마이북 | 줄거리는 직접 쓰세요, 누적 300만 부를 판매한 특별한 일본 책

1999년 가을에 첫 출시된 이후 꾸준히, 아니 최근 들어서 더 사랑받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연말에 재고가 동나는 해프닝까지 생기기도 했죠. 오늘 소개할 일본 기획 시리즈는 신초샤가 발행하는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 이야기입니다.

마이북 | 줄거리는 직접 쓰세요, 누적 300만 부를 판매한 특별한 일본 책

도쿄에 머무는 동안 유독 서점에서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로 나온 신간과 베스트 셀러, 잡지 표지, 그걸 고르는 사람들을 가만 가만 지켜보는 걸 좋아해요. 역시나 서점은 사람들이 지금 뭘 원하고, 무엇에 갈증을 느끼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때 방문하는 서점마다 눈에 잘 띄는 매대에 놓여 있는 책 하나가 있었어요. 이름은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 1999년 가을에 첫 출시된 이후 누적 발행 부수가 300만 부를 돌파한 롱 셀러라 익히 들어 온 책이었죠. 최근 몇년 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사랑을 받으며 전국 서점에서 재고가 동나는 에피소드가 생긴 책이기도 합니다. 어떤 내용이길래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걸까요?

서점에 놓여있는 마이북 사진.
신초샤가 출시한 책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 표지 사진. '자신의 책, 2026년' 이라고 쓰여있다.
©SHINCHOSHA

놀랍게도 이 책의 내용은 텅 비어 있습니다. 줄거리 같은 건 없어요.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하는 주인공이 독자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일본 기획 시리즈는 ‘저자는 당신’이라고 말하는 책입니다.

‘텅 빈 문고본’이 베스트 셀러?

마이북은 겉만 보면 일반 책과 다를 바가 없어요. 책장에 꽂혀 있을 땐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죠. 페이지를 펼치면 그때부터 책이 남다르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내지에는 오직 그 해의 날짜와 요일만이 페이지마다 적혀 있어요. 출판사 ‘신초샤(新潮社)’는 1999년 가을부터 마이북을 매년 연말마다 출시하고 있습니다.

신초샤가 출시한 책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의 역대 표지 사진.
©SHINCHOSHA

이 책의 저자는 독자 본인이에요. 그러니 저자명이 적혀 있을 자리도 비어 있습니다. 커버를 넘기면 나오는 자리에 직접 자신의 이름을 적어야 해요. 보통 저자 사진이나 약력이 있는 커버 안쪽도 스스로 완성하면 되고요.

신초샤가 출시한 책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의 커버를 열어본 사진. 저자명이 비어있다.
©SHINCHOSHA

다음은 목차입니다. 일반 도서와 마찬가지로 마이북에도 목차가 있습니다. 1월부터 12월까지가 챕터를 나누는 기준점이에요. 12월이 지나가면 나오는 건 후기(あとがき)란 입니다. 여기에는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후의 소감을 적으면 돼요. 마치 소설책에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나오는 저자의 끝맺음 인사처럼요. 마지막 페이지는 여느 책과 마찬가지로 판권 정보가 나옵니다.

신초샤가 출시한 책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의 판권 정보가 적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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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북의 핵심이자 개성은 무엇보다 텅 빈 본문에 있어요. 신초샤는 사람들에게 이 새하얀 공백의 책을 자유롭게 사용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매일의 일기이자 기록이 될 수도, 여행의 추억이나 레시피 모음집, 아이디어 노트가 될 수도 있죠. 다만 마이북을 어떤 용도로든 편하게 활용할 수 있게 일반 문고본보다 더 활짝 펼쳐지게끔 했어요. 그해에 책을 완성했든 미완성으로 남든, 한 해가 지나가고 나면 분명 애착이 커질 거라고 말합니다.

신초샤가 출시한 책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 내지 사진. 그해의 날짜와 요일만 적혀 있고 내용은 비워져 있다.
©SHINCHOSHA

마이북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문고본 크기에 가볍기까지 해서 어디든 가지고 다니기 좋아요. 게다가 날짜와 요일이 페이지마다 인쇄되어 있어서 기록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엔 아쉬운 기분까지 들어요. 최근 몇년 간 마이북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는 건 Z세대, 그중에서도 일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보통 일기는 혼자 보기 위한 용도이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하루를 ‘라이프로그(lifelog)’라는 형태로 SNS에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때 손글씨로 쓴 마이북 한 페이지는 사진으로 찍어 올리기에 간편한데다 아날로그 감성도 더해줍니다. 꼭 업로드하지 않더라도 일상 기록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마이북을 애용하고 있어요.

신초샤가 출시한 책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을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습. 용도를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쓸 수 있다.
©SHINCHOSHA

그래서일까요? 2026년의 마이북은 5쇄를 찍어 15만 부 판매를 달성했습니다. 지금껏 단일 연도의 발행 부수가 15만 부를 넘는 건 1999년 출시 이후 24년 만이에요. 특히 젊은 층 구매자가 늘어나 20대 구매 수가 전년 대비 280% 증가(발매 6주 차 기준)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죠.

다른 문학작품과 함께 책장에 꽂혀있도록 의도된 책

책이지만 내용은 비어있는 마이북은 누가, 어떤 의도로 기획한 걸까요? 1999년 기획을 시작한 당사자는 신초샤의 판다 캐릭터 ‘Yonda?’를 디자인한 아트 디렉터 오누키 타쿠야(大貫卓也)입니다. 당시 신초샤는 그에게 캐릭터를 활용한 수첩 디자인을 의뢰했는데, 오누키 타쿠야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첩이라면 색다른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때 책을 만들 때 제작하는 견본(束見本)을 보고 ‘문고본 같은 하얀 책’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죠.

신초샤가 출시한 책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 책등 사진. 책장에 꽂아두면 일반 책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신초샤가 출시한 책 ‘마이북(マイブック, My Book)’ 내지를 펼쳐 본 사진. 날짜와 요일만 적혀 있다.

외형은 문고본과 동일하지만 스스로 써서 완성하는 책. 게다가 문학 작품처럼 책장에 꽂아둘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가치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오누키 타쿠야는 그렇게 ‘마이북’이라는 카피를 떠올리고 커버와 띠를 디자인했어요. 실제 작가들의 문고본과 동일하게 신초샤의 시그니처인 책갈피 끈도 달아뒀죠.

매년 발행되는 그 해의 마이북은 기획자의 의도처럼 책장에 꽂혔을 때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 해에 소중하게 여겼던 이야기와 기록들이 한 권의 책으로서 남아있다는 사실은 무엇이든 휘발되기 쉬운 시대에 더 큰 의미로 남아요.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이야기이고, 인생을 써 내려나가는 주인공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가장 직관적으로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잘 꾸려나가고 싶은 마음은 국적을 불문하고 다 똑같겠죠. 마이북은 최근 일본을 넘어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특히 대만에서는 연말 연초에 일본어 서적 종합 판매 1위를 기록하는 등 중국, 대만을 중심으로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어요.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다이어리와 노트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문고본이라는 포맷을 빌리되 내용을 전부 비워서, ‘당신의 이야기를 직접 적어보세요’라고 이야기하는 마이북은 존재감을 쉽게 잊기 어려워요. 특히나 개인의 서사가 이토록 중요해진 시대에는 더더욱이요. 그게 신초샤의 마이북을 롱셀러이자 베스트셀러로 만든 비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