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이도 | 통조림에 소비기한 대신 '소멸기한’을 새긴 화장품 기업

'Best Before'는 우리가 상품 패키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구입니다. 음식이든, 화장품이든 '최적의 상태'를 안내하는 하나의 기준점이죠. 그런데 시세이도가 최근 이 원칙을 뒤집은 통조림 하나를 만들었어요. 여기엔 'Best After'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시세이도 | 통조림에 소비기한 대신 '소멸기한’을 새긴 화장품 기업
©SHISEIDO CREATIVE COMPANY

식품을 구매할 때 모두가 체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Best Before’라는 문구와 함께 적혀있는 숫자예요. 식품을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는 기한이니 잘 확인해보고 사야합니다. 그런데 최근 시세이도가 만든 통조림 하나가 이 원칙을 뒤집었어요. 소비기한이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Best After 2055”

시세이도가 만든 통조림 '오기미소(男木みそ)' 사진. 오기지마에서 보리로 만든 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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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세이도가 만든 통조림 '오기미소(男木みそ)' 의 상단부 사진. Best after 2055라는 글자가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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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약 30년 뒤에 먹어야 가장 좋은 음식이라니,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통조림의 장점은 오랜 보존 기간이라지만, 음식은 신선할수록 맛있잖아요. 속내를 알기 어려운 통조림 프로젝트는 2026년 아시아 최대 광고 커뮤니케이션 페스티벌인 'Spikes Asia'에서 디자인 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어요. 과연 시세이도가 만든 통조림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었던 걸까요?

인구 140명의 섬에서 사라지고 있는 맛

통조림 속에 들어있는 건 '오기 미소(男木みそ)'입니다. 일본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북부, 인구 140명이 사는 섬 오기지마에서 대대로 이어져 온 보리 된장이에요. 오기지마는 예로부터 자연적인 수계가 없어 수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벼농사가 어려웠습니다. 오래전부터 보리를 재배했고, 보리로 담근 된장이 자연스럽게 섬의 식문화로 자리 잡았죠. 집집마다 레시피는 조금씩 달라도 전부 오기지마 특유의 풍미를 자랑합니다. 메이지 시대 기록에도 남아있을 만큼 역사가 깊어요.

오기지마 섬 풍경. 바닷가에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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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기 미소는 지금 소멸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섬 주민의 60%가 이미 노인이고, 고령화는 급속히 진행되고 있죠. 보리를 재배하는 사람도, 보리 유통도 줄어들고 있으니 로컬 문화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오기 미소는 2055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화장품 회사가 된장 통조림을 만든 이유

시세이도 크리에이티브팀은 세토우치 국제 예술제를 계기로 오기지마를 방문했다가 이 상황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강구하죠. 화장품 회사가 섬 된장에 관심을 갖는다니 오지랖 넓어보일 수도 있지만, 시세이도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람의 외모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삶 속에 깃든 아름다운 것들을 탐구하는 게 브랜드의 방향이에요.

시세이도가 통조림 '오기미소(男木みそ)'를 전시해 둔 사진. 캔 안에는 보리 된장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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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세이도는 오기 미소 통조림을 제작한 뒤 겉면에 쓰여 있어야 할 ‘Best Before’를 ‘Best After’로 교체합니다.그리고 그 뒤에 2055라는 숫자를 써서 오기 미소가 사라지는 시점을 알려줘요. 지금까지 우리가 음식을 언제까지 먹을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음식을 봤다면, 이번에는 ‘음식이 언제 사라질지’를 기준점으로 둡니다. 시간을 보는 관점을 뒤집은 거죠.

이 문구는 사람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깨우쳐 줍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문화에 관심을 갖지 않는 건 냉정해서가 아니에요. 위기를 실감하지 못해서죠. “우리의 전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안타깝긴 하지만 자기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시세이도는 그 거리감을 없애서 사람들을 반응하게 만들었어요.

결과도 그걸 보여줍니다. 설문에서 프로젝트 이후 오기 미소를 보존하고 싶다고 답한 사람은 83.7%, 자신의 고향 전통문화를 지키고 싶다고 답한 사람은 88.7%였습니다. 소셜 게시물은 이전 대비 577% 증가했고, 젊은 주민들은 함께 된장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죠. 다수의 TV 프로그램이 이 소식을 다루며 많은 가정에서 오기 미소 만들기를 배우게 됐습니다.

한 할머니가 오기미소를 들고 웃고 있는 사진. 'Best After 2055' 캠페인의 효과들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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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은 늘 말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이에 조금씩, 조용히 없어지고 우리는 대부분 사라진 후에야 알게 되죠. 이 프로젝트가 한 일은 단순합니다. ‘사라지는 순간’을 미리 눈에 보이게 만든 것뿐이에요. 전치사 하나를 바꾸는 것만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우리는 더 많은 문화를 지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