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기유 하라주쿠 | 가기 전 ‘목욕탕 캘린더’를 체크해야 하는 이곳

2024년 4월, 하라주쿠 한복판에 있는 새로운 상업시설 '하라카도'에 대중 목욕탕이 들어섰습니다. 이토록 개성 넘치는 거리에서 민낯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기해 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로부터 어느새 1년 반이 훌쩍 지났습니다. 이 목욕탕, 하라주쿠에 잘 적응했을까요? 고스기유 하라주쿠의 최근 근황을 함께 만나 볼게요.

고스기유 하라주쿠 | 가기 전 ‘목욕탕 캘린더’를 체크해야 하는 이곳
©︎小杉湯原宿

하라주쿠는 언제 가도 마음이 들뜨는 동네입니다. 메인 스트리트부터 뒷골목까지, 옷차림과 취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요. 트렌디하거나, 튀거나, 최소한 자기 스타일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하라주쿠라는 풍경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970년대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차곡차곡 쌓여온 문화의 결과입니다.

그런 하라주쿠 한복판을, 막 씻고 나온 민낯으로 걷는다면 어떨까요? 화장도, 스타일링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일은 이 동네의 문법과는 어긋나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2024년 4월부터는 꽤 자연스러워졌어요. 하라주쿠에 생긴 상업 시설 ‘하라카도’ 지하 1층에 대중 목욕탕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이 목욕탕의 이름은 ‘고스기유 하라주쿠’. 도쿄 고엔지에서 90년 넘게 운영되어 온 대중 목욕탕 ‘고스기유’의 두 번째 지점입니다. 최신 상업 시설과 오래된 목욕탕의 조합은 오픈과 동시에 화제가 됐어요. 대중 목욕탕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는 시대에, 쇼핑을 목적으로 찾아간 장소에서 목욕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이 둘 간의 궁합이 과연 어떤 결말로 향해 갈지 모두가 궁금해했죠.

벌써 그로부터 1년 반이 흘렀습니다. 과연 고스기유 하라주쿠는 이 동네에 제대로 적응했을까요? 도쿄의 주민들은 어떤 마음으로 하라주쿠 한복판을 민낯으로 걷고 있을까요?

고스기유 하라주쿠의 카운터 사진

목차

  • 오늘의 목욕물을 알려주는 ‘목욕탕 캘린더’
  • 하라주쿠를 거실처럼 사용하는 ‘점’ 대신 ‘면’ 접근법
  • 하라주쿠에 목욕탕이 필요한 이유

오늘의 목욕물을 알려주는 ‘목욕탕 캘린더’

우선 고스기유 하라주쿠가 어떤 목욕탕인지부터 알아볼게요. 고스기유가 하라카도에 두 번째 지점을 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공간적인 새로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대중 목욕탕이 지켜온 고유한 문화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래서 고스기유 하라주쿠는 최신 상업 시설 안에 들어가면서도 식당이나 서양식 사우나, 오락 시설 등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피로를 회복하는 고스기유의 기본 구조에만 충실합니다. 목욕탕 내부에는 고엔지 본점과 마찬가지로 온탕, 냉탕, 밀크탕이 있고, 벽에는 1호점의 벽화를 담당했던 목욕탕 전문 화가 나카지마 모리오가 동일한 후지산 그림을 그렸습니다.

수도꼭지와 세숫대야, 목재 바닥과 다다미를 깐 탈의실까지 곳곳에 일본 목욕탕의 특성이 묻어납니다. 손이 많이 가는 구성임에도 매일 두 차례의 청소를 거르지 않아요. 덕분에 하라주쿠 주민들은 이곳에서 기꺼이 민낯이 되는 편안함을 만끽합니다. 다만 이곳에는 예측 불가능한 즐거움이 존재해요. 고스기유 하라주쿠가 목욕탕에 작은 특별함을 심어두기 때문인데요. 특별함의 정체는 매달 업데이트되는 ‘목욕탕 캘린더’ 속에 적혀 있습니다.

고스기유 하라주쿠의 내부 욕탕 속 나무 의자와 스툴, 나무 바구니 사진
©︎小杉湯原宿

목욕탕 캘린더에는 날마다 달라지는 온탕의 테마가 적혀있습니다. 고스기유 하라주쿠는 계절과 절기, 특별한 날을 기준으로 그날 가장 기분 좋은 목욕을 제안합니다. 이걸 미리 한달 치의 캘린더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공유해요. 새해에는 사케탕으로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고, 동지에는 유자를 탕에 아낌없이 넣는 식입니다. 동지에 유자탕에 들어가면 일 년 내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거든요. 이처럼 캘린더에는 목욕을 둘러싼 생활의 지혜와 시간의 감각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고스기유 하라주쿠에서 만든 목욕탕 캘린더의 1월, 11월 예시
©︎小杉湯原宿

온탕뿐만 아니라 고스기유의 명물인 밀크탕도 때때로 모습을 바꿉니다. 일본에서 11월 26일은 ‘좋은 목욕의 날’로 불려요. 이 시기에는 고스기유에 병우유를 공급하는 야마무라 유업과 협업해 평소보다 훨씬 진한 ‘특농 밀크탕’을 선보입니다. 이런 변화가 1년 내내 진행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조만간 다시 목욕탕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스기유 하라주쿠의 11월 26일 특별 목욕탕 포스터와 유자를 넣은 유자탕의 사진
©︎小杉湯原宿

중요한 건 목욕물이 바뀐다는 사실보다는 고스기유가 목욕물을 다루는 방식을 마치 잡지나 편집샵의 큐레이션처럼 설계한다는 데 있습니다. 근처에 사는 주민들에게 이런 변화는 마치 매달 도착하는 별책부록 같은 존재예요. 더불어 이 큐레이션은 탕 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스기유 하라주쿠는 물을 큐레이션하듯, 목욕탕 밖에서는 하라주쿠라는 동네의 동선을 큐레이션합니다.

하라주쿠를 거실처럼 사용하는 ‘점’ 대신 ‘면’ 접근법

목욕탕 내부의 경험을 이토록 섬세하게 설계한 고스기유는 정작 목욕 전후의 시간은 시설 밖으로 열어둡니다. 이건 최근 유행하는 대형 스파나 복합 목욕 시설과 확연히 다른 선택이에요. 보통은 식당, 휴식 공간, 오락 시설까지 내부에 모두 넣어 소비가 한 공간 안에서 완결되도록 하니까요.

하지만 고스기유 하라주쿠는 목욕탕을 하나의 목적지로 고립시키지 않습니다. 그 대신 방문한 손님들을 목욕탕 주변으로 주변으로 흘려보내요. 씻고 난 뒤 어딘가로 향하고, 머물고, 배회하도록 만듭니다. 목욕탕을 생활 동선의 일부로 설계한 거죠.

이 전략의 핵심 공간이 바로 하라카도 지하 1층, ‘치카이치(地下一)’입니다. 이름 그대로 지하 1층을 뜻하는 이 공간은 약 151평 규모로, 해당 층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고스기유는 이곳을 단순 임대 구역이 아니라, 목욕 문화를 함께 만들어갈 파트너들과의 실험 공간으로 직접 프로듀싱했습니다.

현재 이곳에는 화장품 브랜드 카오(Kao), 스포츠웨어 브랜드 언더아머, 삿포로 맥주 등이 연 단위 계약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각 부스에는 기업 로고 대신 한자가 하나씩 걸려 있어요. ‘별 성(星)’이 적힌 공간은 삿포로 맥주의 비어 스탠드가 되고, ‘맑을 청(清)’이 적힌 부스에서는 카오의 어메니티를 직접 사용해보고 살펴볼 수 있습니다. ‘쾌할 쾌(快)’라는 글자가 걸린 공간에는 카펫이 깔려 있어 요가와 필라테스 수업이 열리죠. 더불어 언더아머는 운동복을 대여하며 고스기유 하라주쿠를 ‘러닝 스테이션’처럼 기능하게 만듭니다.

하라카도 치카이치에 있는 카오(Kao)와 언더 아머(Under Armour) 부스 사진
하라카도 치카이치에 있는 삿포로 비어 부스 사진
©︎小杉湯原宿

이곳에서는 새해에 목욕을 마친 손님들이 다같이 다다미에 앉아 올해의 마음가짐을 붓글씨로 쓰거나, 하라주쿠를 달리고 난 뒤 목욕을 하거나, 잠시 엎드려 잡지를 읽는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비단 지하 1층에만 머물지 않아요. 하라카도에는 푸드 코트와 공유 공간이 건물 곳곳에 있어서 목욕 전후로 식사를 하거나 잠시 쉬기에 좋아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건물 안팎을 오가며, 하라주쿠라는 동네의 면면을 체감합니다.

하라카도 치카이치의 전경

“저희가 운영하고 있는 ‘거리의 목욕탕’이 가진 매력은 목욕 전후로 거리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안내소나 휴게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주변 가게를 방문하며 거리를 느끼는 것도 목욕 체험의 일부입니다. 고엔지 고스기유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역 상점가와 술집에서 즐기는 체험을 하라주쿠에서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어요.”
-히라마쓰 유스케, 고스기유 3대 대표

이는 고엔지에서 고스기유를 운영하는 방식과도 닮았습니다. 고스기유는 대중 목욕탕이 딸린 회원제 공유 공간 ‘고스기유 옆(小杉湯となり)’ 등을 통해 타 업종과 교류하며 관계를 거리 전체로 확장해 나가고 있죠. 목욕탕이라는 ‘점’이 아니라 동네라는 ‘면’으로 접근하면서 한때 느슨해졌던 사람과 거리 간의 관계를 다시 이어붙이는 것입니다.

하라주쿠에 목욕탕이 필요한 이유

일본 전역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대중목욕탕을, 여지껏 대중목욕탕이 없던 하라주쿠 거리 한가운데에 만든다는 것은 전례 없는 도전이었어요. 1년 반이 훌쩍 지난 지금, 고스기유 하라주쿠에는 아기부터 고령자, 학교에 가기 전 들르는 중고등학생까지 등 다양한 지역 주민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라주쿠로 쇼핑 온 10~20대, 국내외 관광객들까지 더해져 이곳에서는 낯선 얼굴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입니다.

하라카도 치카이치의 좌석과 다다미에 사람들이 앉아서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모습
©︎小杉湯原宿

하라주쿠 한복판에 목욕탕이 탄생하고 지금껏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이 동네가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려줍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찾았던 것은 목욕이라는 행위만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동네를 민낯으로 걷는 경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도시에 섞이는 감각은 하라주쿠를 더욱 가까운 동네로 느끼게 합니다.

고스기유의 3대 대표인 히라마쓰 유스케 씨는 2호점을 열면서 ‘사회에는 대중 목욕탕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어요. 이미 고스기유 하라주쿠는 그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요? 트렌드와 개성이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하라주쿠를 민낯으로도 머물 수 있는 동네로 바꿔 놓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