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 감기약 | 기상청보다 날씨에 예민한 중국 국민 감기약의 독특한 마케팅
중국인이라면 집에 하나씩은 반드시 가지고 있는 국민 감기약이 있습니다. 시장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 '999 감기약(999感冒灵)'이에요. 독보적인 입지를 자랑하는 이 브랜드는 마케팅도 열심입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좀 이상해요. 약의 효능을 알리기는 커녕, 사람들이 감기에 걸릴까봐 사사건건 오지랖을 부립니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중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주인공의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감기에 걸린 장면이 한번쯤 나옵니다. 근데 이럴 때 주인공들이 꼭 먹는 약이 있어요. 초록색 패키지에 든 가루를 컵에 쏟은 뒤 따뜻한 물을 부어 마시는 이 약의 정체는 ‘999 감기약(999感冒灵)’입니다.

드라마 속 장면은 PPL 마케팅 때문이지만,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999 감기약은 중국의 국민 감기약으로 통해요. 제약 기업 '화룬산지우(华润三九)'가 만든 이 약은 중국 감기약 시장에서 수년 째 판매량 1위를 고수하며 2025년 상반기에도 오프라인 약국 시장에서 중약 부문 판매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중국인들이 감기에 걸렸을 때 이 브랜드를 떠올리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독보적인 지위와 인지도를 자랑하는 999 감기약은 마케팅에도 강합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좀 독특해요. 약의 효능을 홍보할 생각은 안 하고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사사건건 신경쓰기 때문입니다. 계절이 바뀌어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질 때면 기상청보다도 예민하게 굴 정도예요. 보통의 감기약 브랜드라면 사람들이 아프기를 바라는 게 정상일텐데 정반대의 태도로 우리를 의아하게 만듭니다.
도대체 999 감기약이 사람들이 감기에 걸릴까 노심초사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리고 왜 그렇게 추위와 날씨에 민감한 걸까요? 999 감기약이 선보인 겨울 마케팅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목차
- 강풍에 날아가버린 광고판의 비밀
- 대형 스크린에 띄운 전국 부모님의 메시지
- 옷 만들고 패션쇼까지 여는 감기약 브랜드
- 효능 대신 보살핌을 마케팅하는 이유
강풍에 날아가버린 광고판의 비밀

베이징의 겨울 바람은 건조하고 매섭기로 유명합니다. 기온이 영하 10~20도까지 급격히 떨어질 때 바람까지 불면 체감 온도는 그 이상으로 낮아지죠. 올 겨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길거리를 걷던 사람들의 눈에 구겨진 광고판이 눈에 띄었어요. 강풍을 견디지 못했는지 광고판이 기울어지거나 나뭇가지에 걸려버린 모습이었습니다.
그 광고판의 주인은 999 감기약이었어요. 그런데 자세히 광고판을 들여다 보니 ‘바람이 너무 세니 보온에 유의하세요’라는 카피가 적혀 있었죠. 999 감기약이 베이징의 추위를 재치있게 활용해서 광고판을 일부러 구겨진 듯이 연출한 다음, 사람들에게 몸을 챙기라는 메시지를 남긴 겁니다.
베이징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999 감기약의 광고판까지 삐뚤어지게 만들어버렸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모두의 건강을 지키겠다는 다짐만큼은 절대 쓰러뜨릴 수 없으니까요.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든, 999 감기약이 여러분께 전합니다. 올 겨울, 두 배로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 999 감기약 웨이보 중
동시에 베이징 지하철 역사에도 광고 포스터가 설치되었습니다. 역시나 바람에 모서리가 말려 올라간 듯한 컨셉이었죠. 999 감기약은 아직 강풍의 기세가 여전하다며 연약한 직장인들에게 따뜻하게 겨울을 보내라는 메시지를 남겼어요. 대다수의 브랜드는 보통 완벽하고 정갈한 상태의 광고를 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999 감기약은 스스로 구겨져가며 ‘우리도 당신처럼 베이징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는 동질감을 선사했어요.

999 감기약은 이처럼 가벼우면서도 친근한 장치들을 통해 사람들을 보살피는데 능합니다. 겨울 시즌이 다가오면 누구보다 날씨에 빠르게 반응하면서 따뜻하고 섬세하게 건강을 챙기죠. 가끔은 추위를 알리고 감기를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게 브랜드의 사명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띄운 전국 부모님의 메시지
사람들이 가장 감기에 걸리기 쉬운 때는 방심하기 좋은 때입니다. 전날까지만 해도 날씨가 온화했는데 다음날 기온이 영하로 돌아설 때 우리 몸은 가장 약해요. 이런 순간을 999 감기약이 놓칠 리 없습니다.
999 감기약은 올 겨울, 그중에서도 체감 온도가 확 떨어지는 절기인 소설(小雪)에 캠페인을 펼쳤습니다. 중국 도심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서 ‘감기 조심하라’는 당부 메시지들을 송출했죠. 그런데 이 메시지를 보낸 당사자는 999 감기약이 아니었습니다. 먼 타지에서 살고 있는 자녀를 걱정하는 부모님들이었어요.

누구나 한번쯤 날이 추워지면 부모님에게 ‘옷 따뜻하게 입어라, 몸 잘 챙겨라’ 등의 잔소리를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진심 어린 걱정을 자식들은 가볍게 넘길 때가 많아요. 부모님도 행여나 자식들을 귀찮게 할까 말을 아낄 때가 많고요. 연락을 주고 받기 편해진 시대에 가족 간 교류는 거꾸로 줄어들었죠.
999 감기약은 부모님들의 당부 메시지를 대신 전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실제 목소리를 담기 위해 온라인 공식 플랫폼, 오프라인 매장, 주거 지역 인근, 빌딩 공지 게시판 등 여러 장소에서 메시지를 수집했어요. 그리고 소설 당일, 도시 중심부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전국의 부모님에게서 온 한 통 한 통의 메시지들을 노출시킵니다. 메시지를 띄운 도시는 날씨가 확연히 추워진 베이징, 상하이, 난징, 우한, 시안, 청두 총 6개의 도시였습니다. 한번 메시지들을 살펴볼게요.

날이 추워졌으니 따뜻한 것 좀 많이 챙겨 먹으렴. 집에서 만든 만두 먹고 싶지 않니? 좀 보내줄게. - 안후이성 허페이 루이신 엄마
날이 추우니 옷 든든히 챙겨 입으렴! 우리는 네게 짐이 되지 않을 테니, 너도 나와 네 엄마 걱정시키지 말아라! - 산시성 진청 원빈 아빠
엄마가 보니까 너 왜 오늘은 겨우 몇십 걸음밖에 안 걸었니? 어디 몸이 안 좋은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엄마한테 전화하렴! - 사천성 광원 레이레이 엄마
너희 있는 곳도 날씨가 추워졌니? 어휴, 여기는 추워 죽겠단다! 어제는 눈도 왔어. 너희는 안 춥니? 있잖니, 추우면 내복 꼭 챙겨 입어라. 감기 걸리지 말고. 작년에 산 보온 내복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지? 너 매번 옷 아무 데나 던져두잖아. 제발 좀 잘 정리해둬라. 오리털 파카는 입기 전에 한 번 빨아 입으렴. 겨울 내내 넣어둬서 세균 생겼을 거다. 귀찮아하지 말고. 빨 줄은 아니? 에휴, 이 바보야. 빨 줄 모르면 그냥 세탁소에 맡기든지 해. - 신장 이리 량량 엄마의 편지
우린 어릴 적 네게 요구하는 게 참 많았지. 하지만 지금 타지에 있는 네게 바라는 건 딱 하나란다. 건강하게, 옷 든든히 입고 지내. - 산동 제남 왕홍 아빠
날이 추워졌으니 옷 좀 든든히 껴입으렴. 너는 엘사가 아니란다. 추위 조심해라! - 중경 치엔치엔 아빠
표현 방식도, 말투도 다 다르지만 자식을 향한 마음만큼은 한결 같습니다. 999 감기약은 이 메시지들을 전하며 ‘먼 곳에 있는 부모님이 늘 걱정하고 계시니 오늘 스스로를 잘 돌보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겼어요. 메시지 하단에는 ‘날씨에는 춥고 더움이 있지만, 사랑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습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죠. 이날, 타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많은 청년들이 스크린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를 건 사람들도 많았다고 해요.
지금까지 절기와 관련한 마케팅은 주로 춘절, 중추절 등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메시지나 진행 방식도 서로 겹치곤 했죠. 하지만 999 감기약은 주류에서 벗어난 절기인 ‘소설’에서 힌트를 얻어 부모님의 사랑을 전하며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옷 만들고 패션쇼까지 여는 감기약 브랜드
999 감기약의 감기 걱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목소리를 빌려 '옷을 잘 입으라'고 타이르더니, 이제는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옷 입는 법을 알려주기 시작했어요. 감기를 조심하라고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감기에 안 걸리는 옷차림을 직접 보여주겠다면서요.
감기를 막는 수많은 방법 중 옷차림에 주목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국은 국토가 넓어 남북 간 기온 차이가 꽤 큽니다. 북쪽에 폭설이 내릴 때 남쪽은 여전히 햇살이 강하거나, 실외에서는 추위에 떨다가 실내에서는 더위를 느끼는 일이 다반사예요. 그래서 옷을 어떻게 입느냐가 몸 컨디션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999 감기약은 지역이나 상황에 관계 없이 입을 수 있는 보온 착장 해결책을 직접 제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베이징 복장 학원의 전문 디자이너들과 함께 영하 25도부터 영상 15도까지 각 온도 구간에 맞는 맞춤형 보온 의류를 6세트 제작했어요. 디자인 원칙은 분명했습니다. 보온 기능과 실용성이 최우선이며, 패션이 그보다 앞서서는 안됐습니다.

그후 798 예술구에서 패션쇼를 개최해 이 옷들을 공개합니다. 의상들은 흰색과 초록색이 섞인 999 감기약 패키지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어요. 패션쇼장 주변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겨울 착장 가이드를 제공했어요. 결과적으로 해시태그가 웨이보 실시간 검색어 TOP 20에 오르며 조회수 1억 4천만 회라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감기 예방에 진심인 감기약 브랜드’의 섬세함이 다시 한번 대중에게 각인됐어요.


효능 대신 보살핌을 마케팅하는 이유
지금까지 소개한 999 감기약의 겨울 마케팅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약을 팔기에 앞서 ‘따뜻한 보살핌과 온기’라는 무형의 가치를 파는데 집중한다는 겁니다. 그게 설령 감기약 판매 증가에 직결되지 않는다 해도 말이죠.
하지만 감기약 브랜드가 감기약을 예방하는 일이 결코 헛된 일은 아닙니다. 원래 약이라는 것은 아플 때만 찾기 마련인데요. 평소에 소비자에게 감정적인 가치를 꾸준히 제공해 두면, 언젠가 몸이 아플 때 해당 브랜드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999 감기약은 딱딱한 의약 브랜드, 오래된 브랜드라는 장애물을 이렇게 극복하고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999 감기약의 공식 웨이보를 보면 감기약을 복용하는 안전한 방법, 말장난이나 유머 등을 꾸준히 올리곤 합니다. 감기약을 먹은 후에 훠궈나 밀크티, 과일을 먹어도 되는 지 등 세세한 상황을 소개하며 사람들을 케어해주기도 하죠. 마음 씀씀이가 따뜻한 이 브랜드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소비자에게 필요한 건 설득이 아니라 이해라는 걸 999 감기약은 알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야 999 감기약이 왜 그렇게까지 감기 예방에 공을 들였는지 알 것 같아요.